#1_1_3
***
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세 명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고, 나는 들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고 깨닫기도 하고
때론 만나자마자 깨닫기도 한다고...
여행을 시작한 지 3일 째.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나는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다...
***
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세 명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고, 나는 들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고 깨닫기도 하고
때론 만나자마자 깨닫기도 한다고...
여행을 시작한 지 3일 째.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나는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다...
***
[2009-08-06 木 여행을 시작한 지 3일 째 ]
Story in Shimukappu(占冠)
***
[오전/호베츠 캠핑장]
호베츠의 캠핑장을 떠나려 텐트를 정리하던 때였다.
어제 저녁 수줍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던 두 꼬마와 어머니가 다가왔다.
"함께 사진 찍지 않을래요?"
"물론이죠, 저도 찍어도 되죠?"
한국에서 온 여행자와의 작은 추억이
이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까.
홋카이도의 한 캠핑장에서 만났던
한국인 아저씨를 너희는 기억해줄까.
그들은 내게 앞으로의 여행길도 힘내라 말해줬다.
***
***
Canon-AE1 Filmscan
[오전/호베츠 캠핑장]
호베츠의 캠핑장을 떠나려 텐트를 정리하던 때였다.
어제 저녁 수줍게 음식을 가져다 주었던 두 꼬마와 어머니가 다가왔다.
"함께 사진 찍지 않을래요?"
"물론이죠, 저도 찍어도 되죠?"
한국에서 온 여행자와의 작은 추억이
이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까.
홋카이도의 한 캠핑장에서 만났던
한국인 아저씨를 너희는 기억해줄까.
그들은 내게 앞으로의 여행길도 힘내라 말해줬다.
***
아...언덕이야... /Canon-AE1 Filmscan
[오전오후/274국도]
캠핑장을 나서 다시 274국도로 들어섰다.
난 왜 터널은 곧 언덕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단지 지도상 후라노에 가깝다는 이유로 이 길을 택했지만,
언덕에 언덕에 터널에 터널뿐인 길이었다고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언덕차선의 끝. 가장 반가운 표지판. /Canon-AE1 Filmscan
도중에 몇 번을 멈춰 쉬었는지 모르겠다.
쉴 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날씨는 왜 그리 맑은지?
여기는 홋카이도 아니었던가!
(30도가 넘어가는 날은 몇일 없다는데...그 날이었을 듯)
Canon-AE1 Filmscan
터널.
터널은 길고 좁고 어둡고 탁하고 시끄럽고 무섭다.
2km짜리 터널을 걸어서 지나려면 30분이 걸린다.
긴 터널과 짧은 터널을 5개 지나는 동안
언덕길을 자전거를 끌며 오르는 동안
나는 무척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하도 지나다 보니 익숙해진 터널. /Canon-AE1 Filmscan
득템.
한 터널 입구에는 형광조끼가 있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자전거나 보행자용'이라 써있는.
혹시 몰라 입고서 터널을 통과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공무원으로 보이는 일본인이 나타났다.
"저기,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어요?"
"네?... 아... 뭐... 네...그럼... 브이~!"
아무래도 이 조끼를 실제로 입고 통과하는 사람의 자료사진이 필요했던 모양.
"저기, 이거 어디다 반납하죠?"
"아, 그냥 입고 가세요."
"네?"
"(해맑게 웃으며)저 앞에 또 터널이 있거든요..."
"젠장.."
그러나 다음 터널을 통과해도 반납함은 보이지 않았고,
형광조끼는 여행 내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한국까지 가져왔다...)
***
[오후/810-136지방도]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오후가 다 지날 시간이었다.
마지막이겠지 생각하고 넘은 언덕을 내려가자
또 언덕이 보였다.
점심도 못 먹고 하루종일 언덕에 터널에
지칠대로 지쳐서 도저히 저 언덕만은 넘지 못하겠다!
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
옆으로 빠지는 도로가 보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직감은 저 길은 편한 길!이라 외치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잘못드는 길은 아니었다.
가자.
내리막 길이었다.
야호!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
차도 별로 없던 그 길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
시무캅푸의 가로등. /Canon-AE1 Filmscan
[저녁무렵/시무캅푸 미찌노에끼]
작고 조용한 마을.
시무캅푸에 도착해 미찌노에끼(직역하면 '길의역' 일본의 도로휴게소)를 찾아갔다.
이미 저녁무렵이었고, 근처에 마땅한 캠핑장이 없어 이곳에 캠핑을 할 생각이었다.
근처에 관광지가 있는지 대형버스가 많이 오갔다.
배가 너무 고프다.
건물 뒤편 재털이 근처에 주차를 하고 건물에 들어갔다.
건물에는 관리소와 작은 식당, 기념품가게를 겸한 슈퍼가 있었다.
식당은 한산했고, 낡은 느낌이었다.
한켠에는 오래된 만화가 쌓여있고,
그리고 천정에 고정된 작은 TV.
뭔가 영양가 있는 것을 먹고 싶어
'소고기 크로켓 카레라이스'를 주문했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2명의 손님이 더 왔고,
TV에서는 '노리삐(사카이 노리코)의 행방불명'에 대한 방송이 나왔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 어디에 있을까?
이 때만 해도 난 전혀 이유를 몰랐다.
소고기 크로켓 카레라이스는 시골식당다운 그저그런 맛이었다.
배가 고픈 여행자에게는 물론, 최상의 음식이었지만.
***
[식후/미찌노에끼 건물뒤편 재털이근처]
자전거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물었다.
후. 이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당한 장소에 텐트를 치자.
오늘은 너무 힘든 하루였어.
멍하게 있을 때였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한 손에는 종이가방, 한 손에는 메론.
내 옆에 앉더니 담배를 꺼내신다.
담배는 빨간색 라크(lark).
희끗한 머리에 얼굴에는 주름.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던 할머니
할머니도 담배를 피셨었지.
"어이, 니-짱(한국어로 하면 삼춘정도 될까), 라이터 있어?"
"아, 예. 여기..."
알 수 없는 포스가 느껴진다.
"후- 오늘은 꽤 덥네. 삼춘은 여행중인거야?"
"네. 자전거로 홋카이도를 둘러보려구요. 한국에서 왔어요."
"에? 한국에서? 자전거로? 힘들지 않어?"
"물론 힘들죠. 오늘만 해도 여기까지 오는데 큰 일이었어요. 하하"
"그야 자전거니까 힘들만도 하지. 오토바이로 하면 좋을것을."
"전 오토바이 잘 못타요. 그리고, 힘들어도, 자전거여행은 꽤 즐거워요."
함께 담배를 피며,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삼춘, 있잖아, 오늘 어디서 잘꺼야?"
"에... 여기서요!"
"에? 여기서...? 흠...있잖아. 내가 일하는 곳에서 자면 어때?"
"네?!"
포스의 주인공. / Canon-AE1 Filmscan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니는 사실 이곳 주민이 아니라고 한다.
삿포로에 사는데, 일하러 왔다고.
공사현장의 직원들이 머무는 기숙사에 함께 머물며 밥을 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할머니의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나요? 할머니 일하는 곳인데."
"괜찮아. 괜찮아. 몰래 들어가면 돼. 몰래."
"헉... 몰래라뇨...에이, 안돼요, 안돼. 폐를 끼칠 수는 없죠.
혹시라도 걸리면 어쩌실려구요."
"친구 아들이 놀러왔다고 둘러대지뭐~."
거절과 권유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고 있자니, 더더욱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마음이 약해져서 끝까지 거부하지 못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이야기 도중 먼 곳을 쳐다 볼 때...
일이 없는 시간은 한가해서 심심하다 말하실 때...
담배가 내 전부라고 하실 때...
이혼한 막내딸 이야기를 할 때...
주춤거리는 사이 할머니는 잠깐 집으로 갔다올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 고민했다.
해져가는 풍경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점점 텅 비어가는 미찌노에끼의 한 벤치에서.
그냥 돌아갈까. 할머니에게 큰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도저히 그냥 사라지지는 못하겠다...
나는 할머니를 기다리며 그 날의 일기를 썼다.
새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니들도 집이 있거늘. /Canon-AE1 Filmscan
***
[해질 무렵/미찌노에끼 벤치]
"니~짱!"
멀리서 할머니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마을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일기장을 집어넣고,
망설이면서, 나는 갔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서...
기숙사는 3층의 꽤 큰 건물이었다.
우리는 조심조심, 두근대는 가슴안고 후문으로 들어갔다.
(자전거는 밖에 세워두고 필요한 짐만 들고)
할머니의 주거공간은 전용샤워실과 방이 딸려있었고,
주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만 않으면 괜찮아. 편히 쉬렴."
내가 어쩔 줄 몰라하자 일단 샤워먼저 하라 하셨다.
왠지 긴장되서 초고속으로 샤워를 했다.
"왜 이리 빨리했어? 나중에 다시 해도 괜찮아."
"아,하하 왠지 긴장돼서..."
"안 그래도 되는데... 담배 필래?"
"네? 에... 펴도 되나요?"
"뭐가 문제 있나?"
"한국에서는 어른 앞에서는,
특히 연배가 높은 어른 앞에서는
함부로 담배를 못 피거든요."
"상관없어. 여기는 일본이잖아. 펴. 펴. 여기 재털이."
쿨하시다.
할머니와 담배를 피면서
이시하라 유지로의 노래를 들었다.
트로트풍의 노래.
그의 '버스stop'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있잖아. 나는 말이야. 어디서든 누구와든 금방 친해지는 성격이야.
그리고 격식이라든가 귀찮은 것은 신경쓰지 않고 말이야. 그러니까.. 편하게 있어."
할머니뻘의 분과 좁은 방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맞담배라...
정말 상상도 못할 상황이었지만, 태연자약한 할머니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며 적응해버렸다.
우리는 여러 노래를 들으며 중간 중간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할머니는 우동을 먹자고 하셨다.
맛있었다. 인스턴트였지만. 정말로 맛있었다.
왜 저녁을 먹었을까? 생각할 만큼.
"어라? 한국김치가 있네요? 신기해라."
"그래? 내가 김치를 좋아해. 그런데 맛있는 김치는 지금까지 몇 번밖에 산 적이 없어."
우동을 다 먹고, 함께 담배.
"후- 근데, 삼춘은 이름이 뭐야?"
"음 발음이 좀 어려우실 텐데... 김동현이라고 해요."
"기무..도ㅇ..횬..어렵네."
"그냥 편하게 김상이라고 해도 좋고, 편하게 부르세요. 할머니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레이코."
"그럼 레이코바상(바상은 할머니라는 뜻)이라고 부를께요."
"그래, 잠깐 일하러 갈 테니까, 편히 쉬고 있어."
"네."
그제서야 조금 여유가 생겨 나는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간결한 방이었다.
한 쪽 벽면에는 3장의 코팅된 사진과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사진은 아는 사람이 '키타미(홋카이도의 지명)'의 봄,가을,겨울을 찍어서 준 것이라 한다.
모두 물이 들어있는 사진이었는데 계속 보고 있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며..
종이에 적힌 글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몸의 주인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을 알려는 자는 매일 반성해야 한다.'
으..음.. 심오하군..
다른 쪽 벽면에는 손녀딸, 나나미짱의 그림이 두 장.
그리고 작은 선반에는 cd player와 음악 cd들이.
오래된 가요명곡모음집...으로 추정되는.
남편분이 줬다고 한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CD가 한장.
이불 한 채
메론 상자.
그 위에는 네모난 녹색쟁반
쟁반위에는 유리재털이.
옷장에는 몇 벌 옷. 여벌의 이불
그게 다 였다.
참 간소한 방.
이곳에서 할머니는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는 건가?...
조금 쓸쓸해보이는 풍경이었다.
***
[잠시 후/ 달 밤의 산책]
"삼춘, 산책하러 가자."
할머니는 동전을 챙기며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갔는데 긴장해서 나가는 문이 아니라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더니 할머니는 웃으셨다.
"(속삭이며)이런 담배를 깜빡했네."
"(속삭이며)아, 제 것이 있으니 같이 피시죠."
할머니도 사실은 조금 떨리셨겠지.
기숙사에서 조금 멀어지자, 할머니는 큰 한 숨을 내쉬며
"휴우! 역시 사람은 소리를 내면서 살아야해. 삼춘도 큰 소리내봐~"
참으로 귀여운 면이 있는 분.
길가로 나가자 달이 보였다.
만월에 가까운 달.
시골이라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무척 밝고 아름다웠다.
"어라, 달에...무지개가 있네요."
"정말, 아름답네..."
그토록 크고 선명한 달무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는 한 동안 감탄하며 달무리를 감상했다.
옆에는 작은 별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노안이 와서 이제 작은 별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달빛에 안긴 마을은 고요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지만, 쓸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적당히 기분좋은 바람이 불었다.
맛있는 공기였다.
"한 평생 도시에서 살아서, 항상 풀냄새 섞인 공기를 맡아보고 싶었어."
할머니는 나직이 말하셨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할머니는 커피. 나는 환타 그레이프.
미찌노에끼 벤치까지 걸어가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다.
"클럽..이라고 알아?"
"음... 혹시 아가씨들이 술 따르는 고급 술집 말인가요?"
"그래, 사실 나는 삿포로스스키노에서 클럽을 운영했었어. 뭐 마담같은 거였지."
겉보기에는 시골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알 수 없는 포스는 그것이었던가?
"그러다 척수에 종양이 생겨서 몇 년 동안 고생을 하게 됐어.
그 때 도와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많은 돈을 줘야 할 일이 생겨서 가게를 정리했지.
많은 돈이었지만, 나에겐 은인이니까 전혀 아깝지 않았어.
그 후로는 스낵바를 조금 하다가 그만두고,
아는 사람의 바카라(도박장)에서 일하다가 또 그만두고 이쪽으로 온거야.
돈은...물론 그 쪽이 더 벌 수 있지만 돈보다 중요한게 있으니까.
집에는 딸과 손녀도 있고.. 아무래도 도박장은 도박장이잖아.
손녀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면 그만두는게 맞다 싶어서."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삿포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신거예요?"
"글쎄... 이렇게 시골에서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
정해진 시간만 일하면, 아는 사람도 없고, 복잡한 소리도 없는,
한적한 마을에서 여러가지 책도 읽고 생각하고 그렇게 매일을 보낼 시간이..."
아마도 더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
다음날 찍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 벤치. /Canon-AE1 Filmscan
[늦은 저녁/ 미찌노에끼 벤치에서]
우리는 벤치에 앉아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 중간 대화가 끊길 때가 있었으나, 그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대화를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기분좋은 침묵.
그 한 시간 동안 할머니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런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여행중에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달빛이 빛나는 밤에
한적한 휴게소의 벤치에 앉아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로부터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을거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삶의 연륜과 스스로의 고민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말이야. 의식과 혼(魂)이라는게 있어."
"네? 그 무슨 쌩뚱맞은..."
"이 삼춘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야. 혼은 정말로 있는거야."
"하하, 농담이예요. 말씀하세요."
"못 믿나 본데...그럼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하나 해줄께.
예전에 어떤 사람의 문병을 갔는데 말이야.
그 사람은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는 상태였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서 있었는데, 나만 혼자 맞은 편 침대에 앉았어.
그랬더니 갑자기 지진처럼 침대가 흔들리는거야!
깜짝 놀라서 일어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지진은 없었다고 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또 침대에 앉길래 유심히 봤지.
그 사람, 깜짝 놀라면서 '이게 뭐야!' 하고는 뛰쳐나가버렸어."
"헤에.. 그런일이.."
"아무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늘은 속일 수 있어도,
혼에는 감출 수 없어. 스스로의 혼에는 모든 행동이 기록되는거야.
죽어서 혼만 남아도 그것에는 모든 삶이 담겨있는거야..."
이상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왜 갑자기 여행자청년에게 사람의 혼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자청년이기 때문에
혹은 할머니 자신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상대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인간이라는 건 참 신비로운 존재같아.
생각을 통해서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거든.
인간으로 태어나서 괴로움도 기쁨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어.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에게 아무리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거야."
나는.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동안 내가 가슴속에 담아왔던 것들을,
불현듯 이야기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쩌면 할머니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타인이기 때문에
하룻밤 묵어가는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있잖아. 행여 괴로운 일이 있어도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자꾸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돼.
그건 마음에 쌓여서 결국 자신을 나쁘게 만드니까.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일이, 중요한거야.."
그 말은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많고 많은 닳고 닳은 충고와 위로의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큰 따뜻함이었다.
그 한 마디 말로 모든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금은 평온해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같은 청년에게 몇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순간을 반성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말이야.
사람은 금방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혼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법이야.
적어도 10분! 아니 5분이라도 좋으니까 매일 그런 시간을 가지는게 좋아."
삶의 반성, 명상을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그 후 삶의 놀라움, 혼의 신비로움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몇 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우리는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
심령사진은 아님. 낮에 터널 통과할 때 찍은 사진. 글이 너무 길어서...; /Canon-AE1 Filmscan
[늦은 저녁/ 달 밤의 산책]
"그런데... 할머니는 어째서 오늘 처음 본,
그것도 다른 나라의 정체불명의 청년을
게다가 몰래 재워주시고 먹여주실 생각을 했어요?
자칫..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응? 음.. 나는 말이야. 딱 보면 대충 알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거야.
그리고 내 신조는 말이야.
'할 수 있는 것은 한다' 거든.
인생 길지 않잖아?
내가 무언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재워주면 삼촌은 춥게 안자도 되고
밥도 먹을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편히 쉴 수도 있잖아.
그렇게 한다고 내가 크게 피해보는 것도 아니고."
" '할 수 있는 것은 한다' 라..."
말로는 쉽지만 그 참 어려운 일을 하신거란 말인가...
"시무캅푸는 참 좋은 마을이야. 볼거리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야.
얼마전에는 축제여서 불꽃놀이를 했는데, 참 이뻤어."
"아, 아쉽네요. 아직 일본에서 한번도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는 갑자기 길을 멈추더니,
"아, 여기가 가끔 야채랑 과일을 사는 쿠마(일본어로 곰)상의 상점이야."
"쿠마상...진짜 그렇게 써있네요.. 벼..별명인가.."
평범한 집 앞에 설치된 무인판매대였다.
재배한 작물의 일정 수를 직매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사장이 '사라다'를 좋아하거든. 여기서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가끔 해줘.
식재료랑은 별도로 사서 하는 거지만.. 그 양반은 잘 모를 걸. 후후"
"에.. 그런거예요?"
"뭐,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고...
자... 이제 슬슬 돌아갈까?"
달은 아직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볼 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척 오랜시간을 함께 한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이 무척, 아쉬웠다.
"저는... 오늘 좋은 선생님을 만났네요."
"선생님.. 세상은 모두 선생님이지.
모든 것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스승이지."
"오늘까지는 참 힘든 여행길이였어요.
멋모르고 택한 길이 온통 언덕에 터널에 날도 무덥고 말이예요.
참 신기해요.
사실 할머니를 만날 수 있던 것도
중간에 계획과는 다른 길로 이 시무캄푸까지 와서 였거든요.
이건 우연일까요...?"
"분명 우연이 아닐꺼야.."
"저도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생을 하고 계획과는 다른 길로 와서 참 다행이예요.
할머니를 만나서 지금 무척 행복하거든요."
할머니의 장난기 어린 눈. 깊은 눈.
웃음. 담배 피는 모습. 진지한 표정.
함께 먹은 우동. 함께 들은 음악.
모두.
나에겐 이 여행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이상의 행복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커다란 만남이었다...
묘한 달 밤 속에서 나는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
산책을 끝내고 나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할머니는 내일 아침 준비를 하고 잠드실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4시에 일어나 30분 후에 날 깨우기로 했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서 일까...
나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
:: Today Record ::
[주행거리 37.9km / 주행시간 4:17 / 이동루트(호베츠-시무캅푸) / 숙소(기숙사)]
구글지도로 이동루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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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바상과 아침까지 함께 먹고 드디어 작별의 순간...
할머니가 마지막에 건낸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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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바상과 아침까지 함께 먹고 드디어 작별의 순간...
할머니가 마지막에 건낸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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