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야 미사키. 일본 홋카이도의 최북단이자, 일본의 최북단인 곶이요 땅이다. 최북단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어 많은 여행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소우야 미사키 평화공원이 있다. 1983년 9월 1일.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의 전투기에 격추되어 탑승자가 전원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이곳을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일이다.
2009년 8월 18일. 왓카나이시를 떠나 소우야 미사키를 향했다. 출발할 때는 그저 일본 최북단의 땅에 간다는 것이 설레였다. 홋카이도의 한가로운 풍경을 벗삼으며 달리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슬픔의 역사로 들어간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하늘은 흐림이었다.
갑자기 흐려진 날씨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
소우야 미사키 평화공원
평화에의 염원을 담아 꽃을 심은 근처 어업협동조합의 여성분들
세계 평화의 종
그보다 작은, 아이들의 평화를 비는 '육아 평화의 종'
소우야 미사키 평화 공원을 둘러보는 와중에 대한항공 격추사건을 알게되었다. 충격이었다. 전원사망이라니... 내가 서 있는 이 땅에서 얼마 안 되는 저 차디찬 바다에서 269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말인가... 추락하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 일본 최북단의 땅에 도착했다는 기쁨은 역사의 슬픔에 지워졌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가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본래 궤도에서 이탈하여 소련 영공에 들어간 대한항공의 국적기를 미국의 정찰기로 착각한 소련의 조종사가 격추시켰다고 한다. 조종사 오시포비치는 민간항공기임을 알고있었음에도 격추시켰다고 했다. 이 사건은 소련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모았다.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것인가...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왜 서로를 증오하고 죽여야 하는가? 생명이 덧없이 사라진 바다, '땅의 끝'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평화에의 염원을 상징하는 종이학 모양의 탑
대한항공 격추사건에 대한 설명. 일본인 희생자도 28명. 16개국 269명이 사망..
사망자 명비
일본인 유각족들의 비... 그대들을 기억하오.
(평화) 기원의 탑.
탑의 설계 취지.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듯 타원형의 날개를 가진 학의 형상을 한 탑. 방향은 희생자들이 추락한 바다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1983, 9, 1, 269명, 16개국의 숫자 하나하나를 탑의 구성요소로 넣었다고 한다.
소우야 미사키 해역 해군 전몰자 위령비
***
공원 안에는 또 다른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1943년 10월 11일. 일본과 미국 해군이 5시간에 걸친 처절한 싸움을 했고, 80명의 미군과 수 많은 일본군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유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석의 마지막 문구가 감명깊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형제로서 만나, 양국의 평화가 이어지길. 또한 지금 우리가 따뜻하게 나누는 우정이 다시는 부서지지 않도록 헌신하고 싶다'
일본군은 우리에게는 원수였지만, 그들 한명 한명은 원래는 보통의 시민이었을 것이고,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작고 행복한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정부를 주도한 이들과 그에 찬동한 사람들은 죄를 받아 마땅한다. 그들의 죄는 역사에 진실로 기록되어 영원히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만 당시의 일반 병사와 시민들은 동정한다. '반딧불의 묘'나 '이 세상의 구석에서', '맨발의 겐'과 같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그들의 비참했던 삶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이 다시는 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더더욱 전쟁의 비참함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피해자로서의 일본뿐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일본도 같이다. 그래야만 바른 '기억'이다. 기억을,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일본의 평화헌법이고 일본의 민주주의이다. 여행을 하던 2009년에는 일본 국민들이 그것을 한번 해냈었다. 그로부터 10년간 다시 평화를 헤치려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그러나 한국도 꼭 10년 걸리지 않았던가? 다시 바꾸기 까지.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일본의 차례다. 2020년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의 이목이 주목되는 이 시절에 다시 한번 일본 국민들이 영광을 만들어내기를.
***
언제까지 우리는 서로를 증오해야 하는가.
서로 만나고 대화함으로서 우정의 관계로 갈 수 있다.
나의 여행 테마 중 하나는 일본과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는 역사 책의 일제강점기 내용을 읽으며 혼자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증오하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과 일본인을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이 여행에서 만난 많은 일본인들은 생면부지의 한국인 청년에게 무조건적으로 우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잘못을 사과했다. 물론 내가 만난 일본인은 아주 일부다. 그들의 유독 특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만나 증오의 감정을 해소하고 묵은 과거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 확신했다. 서로 만나 대화함으로서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한국과 일본.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알길래 그토록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경험하고 일본인을 만나서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으면서 막연히 증오한다.
만나자, 그리고 대화하자.
나라의 이름 뒤에 있는 허수아비를 증오하지 말자.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정과 체온을 나눠보자.
일본 최북단의 땅,
소우야 미사키에서,
전쟁이 남긴 슬픈 역사를 만나다.
역사가 남긴 교훈을
저 짐들과 함께 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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